4월 하면 뭐가 생각나시나요? 아마도 벚꽃 축제 같은 꽃나들이를 많이 떠올리시겠죠. 올 4월에는 벚꽃보다 '4월은 잔인한 달'이라는 시 구절이 먼저 생각나는군요. 탄핵 정국에 꽃을 봐도 마음이 무거운 분들이 많으실 텐데요. 1960년 4.19 혁명과 2025년 탄핵 선고를 생각해 봅니다. 4월은 잔인한 달일까요?

4월은 잔인한 달
시를 잘 모르는 사람들도 4월은 잔인한 달이라는 말은 들어보셨을 겁니다. 영국의 모더니즘 시인인 T. S. 엘리엇이 1922년에 출간한 《황무지》(The Waste Land)라는 시의 첫 구절이죠.
이 시는 “20세기 가장 중요한 시 중의 하나”라는 찬사와 함께 현대 문학의 시금석이 되었죠. 전체 434줄인데 그 유명한 “4월은 잔인한 달”(April is the cruellest month)이라는 싯구로 시작합니다.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 내고
추억과 욕정을 뒤섞고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
겨울은 오히려 따뜻했지요.
망각의 눈으로 대지를 덮고
마른 뿌리로 약간의 목숨을 남겨 주었습니다.
(후략)
엘리엇(Eliot, 1888~1965)이 4월을 ‘가장 잔인한 달’이라 불렀던 건 죽어 없어질 줄 알면서도 생명을 탄생시키기 때문일까요. 그래서 아무런 희망도 가질 수 없는 겨울이 오히려 따뜻했다고 말했을까요.
우리 근현대에도 4월이 잔인한 달이었던 적이 많이 있었죠. 제주 4.3사건 (1948)을 시작으로 4.19 혁명 (1960), 세월호 참사 (2014. 4/16)까지 4월은 잔인한 달이었죠.
65년 전, 1960년 4월로 가봅시다.
4.19 혁명
개요
1960년 4월에는 이승만 독재를 무너뜨린 4.19 혁명이 일어났어요. 학생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민주주의혁명이었죠. (4월 혁명, 4·19 의거라고도 불러요)
50년대 말이 되자 반공, 빨갱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경찰력에 의존하던 이승만식 독재가 한계를 드러내기 시작했어요. 지금도 빨갱이 타령인 극우가 생각네요.
도시와 지식인·학생을 중심으로 민주주의에 대한 갈망이 높아져 갔죠.
이승만과 자유당은 정권연장이 불가능해지자 3·15 정.부통령선거에서 부정선거를 공공연히 자행했어요.
학생들을 선두로 한 민심은 폭발했고, 시위대에 대한 경찰의 발포도 이를 막지 못했어요.
이승만의 하야와 망명으로 독재는 종식됐어요. 하지만 혁명은 완성되지 못한 채 군사 쿠데타의 길을 터주고 말았지요.
배경
1950년~1960년 사이에 이승만의 추종자들은 정권에 대한 지지를 획득하기 위하여 대중시위를 조작했어요.
관제 동원으로 1950년대 초까지는 이승만의 인기를 유지시켜 줄 수가 있었어요. 그러나 1950년대 후반에 접어들어 이승만의 인기는 사라졌고, 권력은 경찰의 강제력에 의존하지 않으면 안 되었죠.
원인
1960년 3월 부정선거가 극에 달했어요. 공무원들이 이승만의 당선을 위하여 동원되었죠. 내무부와 경찰이 선거본부가 되어 투표총계를 조작하고 날조했어요.
요즘 부정선거 주장하는 사람들이 갑자기 생각나네요. 진짜 부정선거는 3.15 부정선거죠.
야당선거원들은 체포되고 탄압을 받았습니다. 선거 결과 이승만은 물론 이기붕도 압도적 차이로 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민주당은 선거가 불법이고 무효라고 주장하였습니다. 반정부시위가 전국에 걸쳐 일어나기 시작하였죠. 민심은 이승만의 자유당정권으로부터 거의 떠난 상태였죠.
부정선거 여론이 비등할 때, 마산 시민들은 최루탄을 눈에 맞은 16세 김주열의 시신을 발견했어요. 시민들과 학생들은 거리로 쏟아져 나왔고, 시위 도중 경찰의 총에 맞아 쓰러졌어요.
전개
마산 시위에 대해 이승만은 “공산주의자들에 의하여 고무되고 조종된 것"이라는 담화를 발표했어요. 이승만은 젊은 청년들을 선동하는 정치가와 공산주의자들에 대하여 경고한다고도 했죠.
최근의 반국가세력 주장과 비슷하지 않습니까.
이승만의 이런 견해는 학생들을 더욱 격노하게 하였습니다. 4/18일에는 시위 중이던 고려대학교 학생들이 반공청년단 폭력배들로부터 습격을 받았어요.
이승만이 정권을 유지하는 유일한 길은 폭력을 사용하는 것뿐이었지요.
4/19일 약 3만 명의 대학생과 고등학생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수천 명이 경무대로 몰려들었어요. 경찰은 시위대에게 발포하기 시작했죠.
전국에서 수천 명의 학생들이 가세했습니다. 서울에서만 자정까지 약 130명이 죽고, 1,000여 명 이상의 부상자가 발생하였습니다.
경찰 발포 직후, 주요 도시에 계엄령이 내려졌지만 군대는 방관하는 태도를 지켰지요.
4/21일 내각이 책임을 지고 물러났어요. 이기붕도 정치활동에서 물러났고 장면은 이승만 사임을 촉구하면서 부통령직을 사퇴하였습니다.
시위대들은 이승만의 사퇴를 요구하였습니다. 이승만은 자유당을 비롯한 모든 단체와 결별하겠다고 했습니다.
4/25일 300여 명의 교수들이 이승만의 사임을 요구하는 제자들을 지지하면서 서울시내를 행진하고 나섰습니다.
결과

4/26일 이승만은 대통령직 하야를 발표했어요. 이승만정권의 붕괴는 경찰력으로 유지되던 독재권력이 학생들이 선봉에 선 반경찰 · 반관료적 대중에 굴복하였음을 의미합니다.
교수들의 시위로 시작된 시위의 새로운 물결, 미국의 압력, 경찰력의 붕괴, 군의 지지결여 등으로 이승만은 사임을 발표할 수밖에 없었죠.
이기붕 일가는 이승만 하야 이틀 후에 권총 자살을 했어요. 이승만으로부터 외무장관으로 임명된 허정이 과도정부 수반이 되었어요.
4.18 고대생 의거

개요
4.18 고대생 의거는 모르는 분들도 많을 텐데요. 1960년 4/18일 3.15 부정선거와 자유당 독재를 규탄하기 위하여 고려대학교 학생들이 벌인 시위입니다. 4.18 의거라고도 합니다.
평화 시위였음에도 불구하고 이승만 정부가 동원한 정치깡패들이 시위 후 돌아가는 학생 시위대를 습격하여 다수의 부상자가 발생하였죠.
이 소식을 들은 국민들이 분노하게 되어 다음날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어요.
전개
고대생 3,000여 명은 4/18일 "민주역적 몰아내자"라는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태평로 국회의사당 앞까지 행진했어요. 경찰의 곤봉에 맞아 여러 명이 쓰러지기도 했습니다.
학생들은 저녁이 되자 경찰의 호위를 받으며 학교로 복귀하기로 했어요. 그러나 경찰차가 갑자기 깡패가 있는 경로로 유도했지요.
청계 4가에서 대한반공청년단과 동대문파 깡패들에게 습격받아 수십 명의 학생들과 기자들이 부상을 입었어요.
학생들이 정치깡패에게 구타당해 길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사진이 동아일보 등 조간에 대문짝만 하게 실렸어요. 이를 본 학생들과 시민들이 크게 분노했습니다.
고려대학생 4.18 선언
4.18 당시 선언문 일부입니다.
친애하는 고대학생제군!
한 마디로 대학은 반항과 자유의 표상이다. 이제 질식할 듯한 기성독재의 최후적 발악은 바야흐로 전체 국민의 생명과 자유를 위협하고 있다.
그러기에 역사의 생생한 증언자적 사명을 띤 우리들 청년학도는 이 이상 역류하는 피의 분노를 억제할 수 없다.
만고 이와 같은 극단의 악덕과 패륜을 포용하고 있는 이 탁류의 역사를 정화시키지 못한다면 우리는 후세의 영원한 저주를 면치 못하리라.
말할 나위도 없이 학생이 상아탑에 안주치 못하고 대사회투쟁에 참여해야만 하는 오늘의 20대는 확실히 불행한 세대이다.
그러나 동족의 손으로 동족의 피를 뽑고 있는 이 악랄한 현실을 방관하랴.
(후략)
조지훈 시인의 헌시
조지훈 시인은 당시 고대 국문과 교수로 있었어요. 4/20일에 조지훈은 고대신문에「늬들 마음을 우리가 안다 - 어느 스승의 뉘우침에서」라는 헌시(獻詩)를 투고했고, 큰 화제가 됐어요.
그날 너희 오래 참고 참았던 義憤의분이 터져
怒濤노도와 같이 거리로 거리로 몰려가던 그때
나는 그런 줄 모르고 硏究室연구실 창턱에 기대앉아
먼산을 넋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중략)
사랑하는 젊은이들아
붉은 피를 쏟으며 빛을 불러놓고
어둠 속에 먼저 간 수탉의 넋들아
늬들 마음을 우리가 안다.
늬들의 공을 온 겨례가 안다.
하늘도 敬虔경건히 고개 숙일
너희 빛나는 죽음 앞에
해마다 해마다 더 많은 꽃이 피리라.
아 自由자유를 正義정의를 眞理진리를
念願염원하던
늬들 마음의 고향 여기에
이제 모두 다 모였구나
우리 永遠영원히 늬들과 함께 있으리라.
참 멋진 제자에 멋진 스승입니다.
탄핵 선고
2025년 4월. 계엄에 실패한 대통령은 탄핵 선고를 기다리고 있어요. 헌법재판소는 꿀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꾹 닫은 채 선고를 차일피일 미루고 있습니다.
이대로 4/18일이 지나면 재판관 2명이 임기가 끝납니다. 탄핵 선고를 할 수 없는 사태가 생기는 거죠.
독재의 향수를 그리는 자. 곁에서 기득권을 지키려는 자들이 이 땅의 주인이 아니지요. 혹시나 딴생각하는 재판관이 있다면 역사와 국민의 심판이 기다리고 있음을 기억하세요.
4.19, 5.18에 희생된 수백 명의 고귀한 목숨을 딛고... 우리는 민주주의의 공기를 마시고 있지요. 더 이상 4월이 잔인한 달이 되지 않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