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하고 반포한 지 600년이 다 돼 갑니다. 그 긴 세월 동안 한글은 어떤 길을 걸어왔을까요. 한글날은 어떻게 생겼고 왜 10/9일일까요. 한글의 역사, 한글날의 역사를 같이 알아봅시다.
목차
한글 뜻
한글은 한국어의 공식 문자로서, 세종이 한국어를 표기하기 위하여 창제한 문자인 '훈민정음'(訓民正音)을 20세기 초반부터 부르는 명칭입니다.
기본자음 14자와 기본모음 10자로 총 24자의 음소문자예요. 자음과 자음, 모음과 모음끼리 합쳐서 새로운 자형을 만들 수 있죠. 자음과 모음을 모아쓰기를 하여 한 글자가 1음절을 나타내는 음절문자이기도 합니다.
한글은 홀소리(모음)와 닿소리(자음) 모두 소리틀을 본떠 만들었어요. 창제 초기에는 닿소리 17자에 홀소리 11자로 총 28자였으나, 점차 4자(ㅿ, ㆁ, ㆆ, ㆍ)는 사용하지 않게 되었어요. 한글은 표음문자(소리글자)로 표의문자인 한자에 비해 배우기 쉽고 읽고 쓰기가 편해요. 북한에서는 조선글이라 부릅니다.
세계의 문자를 통틀어 이집트 상형문자나 한자에 기반을 두지 않고 독자적으로 창제된 몇 안 되는 문자 중 하나죠.
한글 창제 이전
우리 말을 글로 나타내기 위해 삼국 시대부터 이두(吏讀)와 구결(口訣)을 써 왔어요. 이두는 한국어를 표기하는 데 사용되었지만 자유자재로 적을 수 없는 한계가 있었죠. 구결은 본래 한문에 구두(句讀)를 떼는 데 쓰기 위한 일종의 보조 편법에 지나지 않았어요. 배우고 사용하기 쉬운 새로운 글자의 출현을 절실히 요구하고 있었죠.
한글 창제와 반포
세종은 집현전 학사들과 더불어 한글을 직접 창제하고 1443년 완성했어요. 세종은 한글을 창제한 후에 약 3년간 한글을 직접 사용하면서 문제점을 보완하고 다듬어 왔죠.
성삼문, 신숙주 등 집현전 학자들에게 해설서인 훈민정음 해례본(訓民正音 解例本)을 발간하도록 했어요. 1446년 한글은 훈민정음이라는 이름으로 반포됐습니다. 같은 이름의 책을 통해서였죠.
한글 사용
1445년 한글을 처음으로 사용하여 악장(樂章)인 용비어천가를 편찬하고 1447년 간행했어요. 모두 125장에 달하는 서사시로 한글로 엮어진 최초의 책이죠.
하급 관리를 뽑을 때 한글을 시험 과목에 추가했어요. 삼강행실을 한글로 백성들에게 가르치도록 하고 사서(四書)를 한글로 번역했죠. 백성들이 관가에 내는 서류를 한글로 작성토록 했고 형률 내용을 한글로 백성들에게 알려 주도록 했어요.
궁중의 여인들에게 한글을 익히도록 하고 세종은 한글로 지시를 내리기도 했습니다. 민간과 조정의 일부 문서에서도 한글을 사용했어요. 한글 보급 정책으로 한글은 점차 퍼져 나갔죠.
한글 홀대
한글은 창제되기 전부터 많은 반대가 있었어요. 창제된 후에도 극렬한 반대가 이어졌죠. 한자라는 훌륭한 글이 있는데 새 글을 만들 필요가 없다는 주장이었어요. 세종의 신념이 없었다면 한글은 빛을 보지 못했겠죠.
한글은 창제된 이후에도 약 450년 동안 많은 시련을 겪었어요. 선비들은 한글을 무시하고 홀대했죠. 한글이 반포된 이후 양반들은 한글 자체를 반대하지는 않았어요. 하지만 한글을 달갑게 생각하지 않았고 2류 문자로 취급했죠. 오랫동안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에 젖어있었기 때문이에요.
지식인 사회에서 홀대받은 한글은 농서, 의서 같은 실용 서적이나 불경을 번역, 편찬하는데 쓰였어요. 고급 정보를 담은 책은 한문으로 간행되었습니다. 실학자였던 정약용, 박지원, 박제가 등도 한문으로만 저술을 남겼어요. 실학자조차 실용적인 한글을 외면하고 한자를 우대하는 양반 사대부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죠.
한글이 무시당하는 풍조는 19세기 후반까지 이어졌어요. 육영공원과 배재학당의 교사였던 미국인 헐버트의 회고록에 나오는 글입니다. '조선인들은 위대한 문자인 한글을 무시하고, 사대부들에게 한글을 아느냐고 물으면 입에 거품을 물고 모른다고 답했다.'
한글 무시
한글이 ‘훈민정음’이라는 이름으로 반포된 초기에는 '정음(正音)' 또는 '언문(諺文)'이라고도 불렸어요. 정음은 훈민정음을 약칭한 것이죠.
언문은 배우고 익히기 어려운 한자 대신 주로 백성들이 일상적으로 쓰는 글이라는 뜻입니다. 언문이라는 명칭은 세종대왕이 처음 썼기 때문에 당초에는 비하적 의미가 없었어요. 그런데 양반들은 언문을 상것들이나 쓰는 글이라 하며 하대했죠.
한글을 '가짜글'이라는 의미로 언서(諺書)라고 부르기도 했어요. 한자를 진짜 글이라는 의미의 진서(眞書)라 부른 것과 비교한거죠.
일부에서는 '반토막글'이라는 의미로 반절(反切)이라 부르기도 했어요. 암클(암글)이라고도 불렸는데 여성 등 글을 배우지 못한 경우 쓰는 부족한 글씨라는 뜻이었어요. 글을 배우지 못한 아이들이나 쓰는 글이라 하며 '아햇글'이라고 부르기도 했죠. 승려나 중인(中人) 이하에서나 쓰는 글자라는 뜻으로 '중글'이라고도 불렀어요.
구한말 국문의 등장
한글 창제 후에도 조선의 공식문자는 여전히 한자였어요. 양반과 지식인에게 외면받던 한글은 구한말과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큰 변화를 겪게 됩니다. 1894년(고종 31년) 갑오개혁에서 한글을 국문( 國文, 나랏글)이라고 불렀습니다. 법령을 모두 국문을 바탕으로 한문 번역을 붙이거나 국한문을 섞어 쓰도록 했죠. 한글은 1894년이 되어서야 형식적이나마 제1공용문자의 지위를 획득했어요.
한글 사용이 점차 늘자 한글 표기법에 관한 문제가 제기되었어요. 1905년 지석영의 신정국문(新訂國文)이 한글 맞춤법으로 공포되었어요. 1907년 통일된 문자 체계를 확립하기 위한 한국어 연구 기관으로 국문 연구소가 설치되었죠. 1506년 중종 때 언문청이 폐지된 이후 처음으로 한글을 연구하는 국가기관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한글이라는 이름
일제강점기에 '한글'이라는 이름이 등장했어요. 한글이라는 이름의 유래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있죠. 가장 널리 알려진 견해는 주시경이 한글이라는 이름을 처음 지었고 1912년 소리갈(음성학)이라는 책에 처음 썼다는 것이에요. 한글이란 이름은 '으뜸이 되는 큰글', '오직 하나뿐인 큰글', '한국인의 글자'라는 뜻입니다.
한글 연구 본격화
우리말과 글의 연구를 위해 1908년 주시경이 국어연구학회를 창립했어요. 그 후 몇 차례 이름을 바꾸어 1931년 조선어학회로 이어집니다. 그동안 많은 강연, 학술대회를 열었어요. 1926년 한글날을 제정하고 1927년 동인지 ‘한글’을 창간했죠.
이후에도 한글맞춤법 통일안 제정(1933), 표준말 사정(1936), 외래어 표기법 통일안 제정(1940)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했어요. 1942년 일제가 자행한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국어연구가 중단되기도 했죠.
한글 보급 운동
일제는 강압적인 무단통치를 일삼았어요. 민족말살과 황국식민화 교육, 우민화 정책으로 일본어 학습 확대, 한국어 교육 축소를 단행했어요. 일제의 교육정책으로 1930년 무렵 문맹률은 약 70%에 달했어요.
심각성을 깨달은 민족 지도자들은 문맹퇴치를 위해 한글보급운동에 나섰어요. 신문사들도 이 운동에 동참했죠. 조선어학회도 전국순회 조선어 강습회를 열었어요. 일제는 1934년 이 운동을 강제로 금지시켰습니다. 1930년대 말부터 한국어 교육을 폐지하고 우리말 사용도 탄압했어요.
한글학회의 활동
광복 후 활동을 재개한 조선어학회는 1949년 한글학회로 이름을 바꾸었어요. 큰 사전 편찬(1957), 쉬운말 사전(1967)을 시작으로 한글 연구를 하고 있죠.
간송미술관에 보관 중인 훈민정음 해례본(간송본)은 1962년 국보 70호로 지정되었고 199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되었어요.
한글날 역사
한글날은 세종대왕이 1446년 훈민정음을 반포한 날을 기념하고 한글 사랑 의식을 높이기 위한 국경일입니다. 매년 10/9일로 법정 공휴일이며, 5대 국경일로 태극기를 게양하는 날입니다.
첫 한글날 기념식은 훈민정음 반포 480년을 기념하여
1926년에 있었어요. 세종실록 1446년(세종 28년) 음력 9/29일의 기록에 따라 훈민정음을 9월 중에 반포했다고 추정하죠. 이를 근거로 음력 9/29일(양력 11/4일)에 훈민정음 반포를 기념하는 행사를 가진 것입니다.
조선어연구회와 신민사의 공동 주최로 식도원이라는 요릿집에서 수백 명이 참가한 가운데 성대하게 열렸죠. 아직 한글이라는 명칭이 널리 알려지지 않아 '가갸날'이라고 불렀어요. 한글날로 이름이 바뀐 건 1928년입니다.
음력이라 날짜가 매년 바뀌자 1931년 음력 9/29일을 그레고리력으로 환산해서 1932년부터 10/29일에 행사를 치렀어요. 1934년에 다시 환산하여 1945년까지 10/28일에 행사를 치렀습니다.
1940년 훈민정음 해례본이 발견되면서 책 발간이 음력 9월 상순(1~10일)인 게 확인되었죠. 상순의 마지막인 음력 1446년 9/10일을 그레고리력으로 변환해 10/9일을 기념하게 되었어요.
1945년 이후에는 10/9일에 한글날 행사를 진행했어요. 1949년부터 공휴일로 지정되었죠. 1991년~2012년까지는 휴일이 아니었어요. 10월에 공휴일이 많아서 일반 기념일로 바뀐 것입니다. 2006년부터 기념일에서 국경일로 바뀌었어요. 2013년부터 다시 공휴일이 되면서 지금처럼 국경일이자 공휴일이 됐어요.
한글은 세종대왕이라는 현군이 없었다면 태어나지 못했겠죠. 양반과 지식인층은 사대에 젖어 한글의 가치를 외면했어요. 하지만 한글은 나라를 잃었을 때 오히려 빛을 발했습니다. 일제강점기인 1912년경 주시경이 한글이라는 이름을 처음 썼죠. 한글날은 1928년 이름이 정해지고 1940년에 10/9일로 정해졌어요. 한글과 한글날의 역사를 알고 보면 한글의 가치를 더 잘 알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