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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아카이브

제주 4·3 사건 4·3 평화공원 한강 작별하지 않는다

by 지식웰니스3 2024. 10.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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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 사건은 제주도에서 1947년 3/1일을 기점으로 이듬해 발생한 소요사태입니다. 7년 넘게 이어진 진압 과정에서 주민들이 만 명 넘게 희생당한 사건이죠. 제주 4·3 사건 전개과정과 4·3 평화공원, 그리고 제주 4·3 사건을 그린 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까지 함께 알아봅시다.

 

제주 4·3 사건 4.3 평화공원 한강 작별하지 않는다

 

 

 

 

목차

     

     

     

     

    제주 4·3 사건 뜻

     

    제주 4·3사건은 제주도에서 1947년 3/1일을 기점으로 하여 1948년 4/3일에 발생한 소요사태입니다. 1954년 9/21일까지 7년 넘게 이어진 무력충돌과 진압 과정에서 주민들이 만 명 넘게 희생당한 사건이죠.

     

     

    여순 사건, 국민방위군 사건, 보도연맹 학살사건, 경산 코발트광산 학살사건, 거창 양민 학살사건, 대전 산내 골령골 학살 사건 등과 더불어 제1공화국 때 민간인이 억울하게 희생된 대표적인 사건입니다.

     

    이 사건들 중에서도 제주 4·3 사건은 가장 많은 사망자가 발생한 사건입니다. 미군정, 대한민국 정부, 남조선노동당 세력들 모두가 민간인 학살에 적극적으로 가담했습니다. 4·3이라는 명칭은 1948년 4/3일에 발생했던 대규모 소요사태에서 유래했습니다. 

     

     

    제주 4·3 사건 발단

     

    8·15광복 직후, 외지에 나가 있던 6만여 명의 제주도민들이 일시에 귀환했어요. 귀환한 사람들은 직업을 구하기 어려웠죠. 생필품 부족, 콜레라, 극심한 흉년과 식량난 등이 겹쳐 민심이 악화되었어요. 일제에 부역한 경찰들이 미군정경찰로 변신했고 군정관리들은 부정을 일삼는 등 사회 문제가 부각되었어요.

     

    이처럼 혼란한 상황에서 이른바 '3·1절 발포사건'이 발생하여 제주 4·3 사건의 도화선 역할을 했습니다.

    1947년 3/1일, 좌파 진영의 제주 민전(민주주의민족전선)이 3·1절 기념집회를 열었어요. 기념식을 마친 군중은 가두시위를 했고 관덕정 앞 광장에서 구경하던 아이가 기마경찰의 말에 차이는 사고가 생겼어요.

     

     

    기마경찰에게 일부 군중이 돌멩이를 던지며 쫓아갔고, 경찰이 발포하여 6명이 사망하고 6명이 중상을 입었어요. 또한 도립병원에 있던 경찰이 공포심에 소총을 난사하여 행인 2명에게 중상을 입히기도 했죠.

     

    삼일절 발포 사건으로 격앙된 민심은 남조선로동당에게는 좋은 기회로 다가왔죠. 남로당 제주도위원회는 3·1 사건에 항의하는 3·10 총파업에 돌입하여 제주도 전체 직장의 95%가 동참했어요. 미군정은 사태가 심각해지자 진상조사에 나섰죠. 경찰에 대한 반감과 남로당의 대중선동으로 총파업이 확산되고 있다고 분석했어요. 대응책으로 좌익세력 척결에 주력하는 정책을 전개했습니다.

     

     

    전개과정

     

    제주에 내려온 미군정청의 경무부장 조병옥은 제주의 치안을 바로잡겠다는 포고문을 발표했어요. 파업 주모자들이 검거되었으며, 총파업은 진정 국면에 접어들었죠.  

     

    1948년 남로당은 남한의 단독선거를 저지하기 위해 전국 총파업을 일으키는 이른바 '2·7구국투쟁'을 전개했어요. 제주에서는 무장투쟁 방침이 결정되었죠. 4/3일 350명의 무장대가 경찰지서, 우익단체 요인의 집을 습격했어요. 경찰, 민간인 등 12명이 사망했죠.

     

     

    무장봉기 초기에 미군정은 이 사태를 경찰이 담당할 '치안 문제'로 파악했어요. 제주의 해상교통을 차단하고 미군 함정으로 해안을 봉쇄했죠. 사태가 악화된 자경비대가 진압작전에 참가하도록 했어요. 그 후 경비대와 무장대는 평화협상을 진행하여 전투 등을 합의했어요.

     

    하지만 우익청년단체가 일으킨 오라리 방화사건으로 협상이 파기되었어요. 미군정은 경비대에 총공격을 명령했고 진압작전 주도권은 경찰에서 경비대로 넘어갔어요. 8/15일 대한민국이 수립되고 이승만 정부는 제주도경비사령부를 설치했어요.

     

     

    사령부는 해안선으로부터 5㎞ 이외의 지점 (중산간)  및 산악지대의 무허가 통행을 금지했어요. 어기면 폭도배로 총살에 처할 것이라는 포고문을 발표했죠. 통행금지 지역인 중산간마을 거주를 사실상 금지한다는 의미였죠. 이어서 해안이 봉쇄되었고, 제주도 전역에 계엄령이 선포되었어요.

     

    이후 중산간마을을 초토화시킨 강경진압작전으로 마을의 95% 이상이 불에 타 없어지고 많은 인명이 희생되었습니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하여 산으로 들어가 무장대의 일원이 되기도 했어요. 가족 중에 청년이 사라진 집안의 사람들은 부모와 형제자매를 대신 죽이기도 했습니다. 재판절차 없이 집단으로 사살하기도 했어요.

     

     

    조천면에서 남녀노소 400여 명을 총살한 ‘북촌리사건’도 자행됐습니다. 주민들은 무장대의 습격으로 민가가 불타고 희생되기도 했어요. 1949년 사면정책에 따라 많은 주민들이 하산했죠. 무장대 총책도 사살되면서 사실상 궤멸되었어요. 6·25 전쟁이 발발하면서 보도연맹 가입자, 요시찰자, 입산자 가족 등이 대거  처형당했습니다. 수감주미던 4·3 사건 관련자들도 즉결처분되었어요.

     

    6·25 때 한라산에 잔존한 무장대는 60여 명이었어요. 그후 진압작전으로 무장대의 잔여인원은 계속 줄어들었어요. 마지막 무장대원은 1954년 4/2일에 생포되었죠. 9/21일 한라산의 금족(禁足) 지역이 전면 개방됨에 따라 4·3 사건은 7년 7개월 만에 종결되었어요. 

     

     

    사후처리

     

    2000년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공포되었죠. 이에 따라 발족된 위원회는 진상조사 결과 제주 4·3 사건을 다음과 같이 정의했어요.

     

    “제주 4·3 사건은 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하여, 경찰·서북청년회의 탄압에 대한 저항과 남한의 단독선거·단독정부 반대를 기치로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가 무장봉기한 이래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장대와 토벌대간의 무력충돌과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수많은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이다."

     

     

    희생자 신고 접수 결과 1만 4532명으로 집계되었지만 실제로는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2003년 노무현 대통령은 국가권력에 의한 과오를 인정하고, 공식 사과문을 발표했어요. 2008년 4·3 평화공원이 개관하고 2018년, 2020년 4·3 희생자추념식에는 문재인 대통령이 참석했죠.

     

     

    2020년 발간된 [제주 4·3 추가진상보고서]에 의하면 확인된 민간인 희생자는 총 14,442명이었습니다. 사망자 중 78.7%는 토벌대에 의해, 15.7%는 무장대에 의해 발생했어요. 초토화 작전 시기(1948.10/11~ 1949.3/1)에 희생자의 67.2%가 발생했습니다. 총 희생자 수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최대 제주도민 8분의 1이 죽거나 행방불명(3만~8만 명)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소설 '순이 삼촌'

     

    제주도에서는 워낙 희생자가 많아서 친척 몇 다리만 건너면 4.3 사건 희생자라는 말이 있어요. 요즘도 제주도에서는 마을별로 제사가 거의 비슷한 날에 치러지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현기영의 소설 '순이 삼촌 (1978)'에 주인공이 집집마다 같은 날 제사 지내는 것을 의아해하는 대목이 있어요. 이 소설의 소재가 된 북촌리 학살은 1949년 1월에 발생했어요. 토벌대가 돌아다니며 순차적으로 학살을 했기 때문에 마을별로 같은 날에 제사를 지내는 것입니다.

     

     

    이러한 참혹한 살육에는 이승만 정부와 미군정에 가장 무거운 책임이 있어요. 좌우 이념만 내세워 국민의 생명에는 관심도 없었죠. 남로당 제주도당도 제주 도민을 선동하여 사태를 파국으로 몰아간 책임이 크죠. 하지만 남로당의 봉기는 당국의 탄압으로 부정적인 여론이 있어서 가능했던 것입니다.

     

     

    제주 4·3 평화공원

     

    제주4·3평화공원내에 위치한 기념관 (홈페이지)

     

    제주 4·3 평화공원은 4·3사건으로 인한 민간인학살과 제주도민의 처절한 삶을 기억하고 추념하며, 화해와 상생의 미래를 열어가기 위한 평화·인권기념공원입니다. 제주4·3평화공원 조성은 제주 4·3 사건에 대한 공동체적 보상의 하나로 이루어졌습니다. 2003년 기공식을 하고 2008년 평화기념관이 개관하게 되었습니다. 제주시 봉개동에 있습니다. 

     

     

    제주 4.3 평화기념관에는 총 6개의 특별 전시관이 있습니다. 1관에는 주민들의 피신처로 활용되었다는 천연동굴을 주제로 한 역사관이 있으며, 2관에는 3.1절 기념행사에서 사망한 6명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3관에는 1948년 4/3일에 일어난 무장봉기에 대한 이야기가 있고, 4관에는 학살에 관한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5관과 6관에는 진상 규명 운동으로 상처를 극복해 내는 과정과 관람 후 소감문이 걸려 있습니다.

     

     

    제주 4·3 평화공원 주요 시설

     

    제주 4·3 평화공원의 주요 시설로는 위령제단 > 위패봉안실(희생자 1만 4532명 중 1만 4401명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 공간) > 위령광장 > 봉안관(4·3 희생자 유해 봉안) > 각명비원(희생자의 성명, 성별, 당시 연령 등을 기록) > 행방불명인 표석 > 평화기념관 등이 있습니다.

     

    위패봉안실

     

    4·3 당시 희생된 희생자의 신위 1만 4401기가 봉안돼 있어요. 희생자들의 신위는 그 당시의 지역별·마을별로 배치되어 있습니다. 방문객들이 희생자의 억울한 넋을 위로하기 위한 추념의 공간으로, 4·3 위령제 때 많은 유족들과 참배객들이 찾는 곳입니다.

     

     

    위령제단·위령광장

     

    정방형의 위령광장과 반원형 부채꼴의 대형 제단으로 이루어진 위령제단은 4·3 사건 희생자를 추모하기 위해 조성된 곳입니다. 매년 4월 3일 위령제가 정기적으로 열리고 있어요. 돌무더기 형태의 제단에는 4·3 영령을 상징하는 꺼지지 않는 불꽃이 있습니다.

     

    봉안관

     

    2006~2018년까지 추진된 유해발굴사업을 통해 발굴된 유해를 봉안하는 장소로, 2020년 4월 현재 380기가 안치되어 있습니다. 각 비원에는 희생자의 성명과 성별, 당시 연령 등이 기록돼 있습니다.

     

     

    제주 4·3 평화기념관

     

    지하 1층·지상 4층의 규모로 4·3의 역사를 담은 그릇의 형태를 차용했어요. 4·3의 역사적 진실을 기록한 상설전시실과 특별전시실, 기획전시실, 개가자료실, 영상관 등으로 구성돼 있습니다. 정부의 제주4·3사건진상보고서를 토대로 전시 연출된 상설전시실은 4·3의 발발, 전개, 결과, 진상규명운동까지 역사교육의 장이 되고 있습니다.

     

     

    한강 '작별하지 않는다'

     

     

     

     

    [작별하지 않는다]는 2024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한강이 2021년 발표한 작품입니다. 제주 4·3 사건을 소재로 한 장편소설이죠.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그린 [소년이 온다]와 함께 세계적인 거장의 반열에 오르게 한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어요. 제주 4·3 사건의 참혹한 역사를 작가는 어떻게 그리고 있을까요.

     

     

    [작별하지 않는다]는 주인공인 소설가 경하와 제주 4.3 사건 생존자인 인선을 통해 제주 4.3에 대한 기억과 치유를 담고 있습니다. 소설은 경하가 제주 4.3 사건을 소재로 한 소설을 쓰기 위해 제주도로 내려가면서 시작됩니다. 경하는 제주도에서 인선을 만나고, 인선의 가족들이 제주 4.3 사건으로 희생당한 이야기를 알게 됩니다.

     

     

    인선의 가족들은 군경에게 학살당했고, 인선은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습니다. 인선은 오랜 세월 아픈 기억과 함께 살아왔죠. 경하를 만나면서 그 기억을 털어놓기 시작합니다. 경하는 인선의 이야기를 들으며, 제주 4.3 사건에 대해 얼마나 무지했는지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인선과 함께 제주 4.3 사건을 기억하고, 그 희생자들을 추모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작별하지 않는다'는 잊지 않는다는 의미로 필자는 느꼈어요. "우리가 이 기억을 잊지 않고 기억하고 기억하는 한, 그들은 영원히 죽지 않을 거예요." 경하가 인선에게 한 말입니다.

     

     

    경하는 악몽 속에서 인선의 죽은 어머니를 만납니다. 인선의 어머니는 제주 4·3 사건 때 실종된 오빠를 찾다 생을 마쳤어요. 그녀가 오빠를 찾던 마음을 “작별을 고하지 않고, 작별하지 않은 상태”라고 말합니다.  악몽 혹은 환상을 통해 주제에 다가가는 표현은 전작인 [검은 사슴]에서도 본 듯합니다.

     

    '작별하지 않는다'는 제주 4.3 사건이라는 아픈 역사를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이 더 나은 미래를 만드는 길임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제주 4·3 사건과 4·3 평화공원, 그리고 제주 4·3 사건을 그린 '작별하지 않는다'까지 알아봤어요. 제주 4·3 사건은 독재와 무자비한 진압, 민중의 저항이 어우러진 비극적인 사건입니다. 제주 4·3 사건과 작별하지 않는 마음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다음에 제주도에 가면 4·3 평화공원은 꼭 들러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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