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천절을 맞아 살펴보는 개천절 이야기 1, 2편은 각각 홍익인간, 단군신화와 단군에 대해 알아봤어요. 개천절 이야기 3편은 고조선의 건국과 멸망을 중심으로 알아보겠습니다.
목차
고조선 개요
고조선(古朝鮮, 기원전 5세기 이전~기원전 108년)은 단군왕검이 세웠다고 전해지는 한반도 최초의 고대 국가입니다. 역사학계는 일반적으로 고조선이 청동기 문명을 기반으로 중국 랴오닝성~북한 황해도~평안도~함경도~강원도에 있던 고대 국가라고 파악하고 있어요.
문헌상의 기록에 따라 실존했던 국가라는 사실은 분명하지만 관련 기록이 적고 추상적이죠. 직접적인 유물·유적이 발견되지 않아서 고조선의 연대, 영토, 역사 등에 대해 많은 논란이 있어요.
고조선 국호
원래 국호는 조선(朝鮮)이지만 일연의 삼국유사에서는 위만이 찬탈한 위만조선과 구분하기 위해 고조선이라 지칭했어요. 오늘날에는 조선과 구분하기 위해 고조선이라 부릅니다.
이승휴의 제왕운기에서는 단군이 다스린 조선을 단군조선(전조선), 기자가 다스린 조선을 기자조선(후조선)으로 구분하여 불렀어요.
조선의 어원
조선의 어원에 대해서는 여러 주장이 있지만 명확하게 밝혀진 것은 없어요. 사기집해에 인용된 장안의 견해는 조선이 강의 이름에서 나온 것이라 했죠. 신채호는 조선의 어원이 숙신(肅愼)에서 나왔고, 원래 명칭은 주신(珠申)이라 주장했어요.
고조선의 초기 도읍인 아사달(阿斯達)을 한역한 것이 라는 견해도 있죠. 글자 뜻을 그대로 해석하여 ‘땅이 동쪽에 있어 아침 해가 선명하다(地在東表 朝日鮮明, 지재동표 조일선명)’에서 나온 것이라는 주장도 있죠.
고조선 건국
고조선 멸망이 기원전 108년임에는 거의 이견이 없죠. 하지만 고조선의 건국 시기는 영토 논란과 함께 가장 주목을 받는 논란이에요. 고조선 건국 시기에 따라 한국사의 길이가 결정되기 때문이죠.
전통시대에는 기원전 2333년 무렵 건국되었다고 전하는 단군조선을 조상으로 인식하고 제사를 지냈어요. 고고학이 없었던 때라 역사서에 전적으로 의존했기 때문이죠. 고조선은 문헌 자료가 극히 제한적이라 고고학이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합니다.
고조선의 건국 연도는 기원전 2333년으로 알려져 있죠. 조선 성종 15년(1484)에 편찬된 서거정의 동국통감에 나온 연대를 따른 것이에요. 이 책에서는 고조선 건국을 요임금 즉위 25년 뒤인 무진년(기원전 2333년)으로 추정했어요.
이전에 쓴 고려사, 백문보전, 제왕운기, 삼국유사에도 고조선 건국 연도가 나와요. 각각 기원전 2361년, 2333년, 2308년, 2284년으로 언급했죠. 중국 요임금 즉위년을 기준으로 더하기 빼기를 한 것입니다. 그런데 요임금 자체가 삼황오제 전설에 등장하는 신화적 인물로, 실존 여부가 확실하지 않아요.
고조선의 건국이념
고조선의 건국이념은 잘 알려진 홍익인간 등 4가지입니다.
- 홍익인간(弘益人間): (당시 부족사회의) 모든 사람들이 어우러져 행복하게 한다.
- 재세이화(在世理化): (홍익인간의) 진리가 세상에 있도록 만든다.
- 이도여치(以道與治): (그 정신을 계승하여 갈등과 병폐를) 사람의 길로써 낫게 한다.
- 광명이세(光明理世): 깨달음으로 세상을 밝게 만든다.
도읍지
고조선의 도읍지는 여러 차례 바뀌었어요. 삼국유사는 단군왕검이 평양성에 도읍을 정하였으나 백악산
아사달로 옮겨서 1천 5백 년간 나라를 다스렸다고 합니다. 주나라 때 기자가 조선왕에 책봉되자, 단군은 장당경으로 옮겼다가 뒤에 아사달로 돌아왔다고 하죠.
북한은 1970년대 이전에는 고조선의 도읍지를 랴오닝성이라 주장하였으나, 주체사상 이후에는 평양시가 도읍지라고 주장합니다. 국내 역사학계에 따르면 랴오둥반도를 중심으로 발전하다가 기원전 3세기 연나라에 영토를 뺏기고 평양 일대로 이동했다고 합니다.
고조선의 마지막 왕조인 위만조선의 도읍지인 왕검성은 오늘날 평양시에 있었다는 견해가 지배적입니다.
위만조선
기원전 195년 연나라의 위만은 1,000여 명을 이끌고 고조선으로 들어왔어요. 준왕은 위만을 신임하여 변방의 수비를 맡겼어요. 그러나 위만은 기원전 194년 수도인 왕검성에 입성하여 준왕을 몰아내고 왕이 되었죠. 이때부터 위만조선이라고 부릅니다.
위만은 유이민 집단과 토착세력을 지배체제에 참여시켜 정치적 안정을 도모했어요. 철 등 중국 문물을 수용해 군사력을 강화하고 진번, 임둔 등을 복속시켰어요. 위만의 손자 우거왕 때는 남쪽의 진국(辰國) 등이 한나라에 조공하는 것을 막고 중계무역의 이익을 독점했어요.
고조선의 멸망
한나라가 동방으로 진출하면서 위만조선과의 긴장을 고조시켰어요. 양측은 외교적 절충을 벌였지만 성공을 거두지 못했어요. 기원전 109년 한무제는 위만조선을 공격하였으나 실패했어요. 이후 전쟁이 재개되고 장기화됐죠.
전쟁이 장기화되자 고조선의 지배층 내부가 분열되었이요. 무리를 이끌고 진국으로 가거나 왕검성에서 나와 항복했어요. 내분의 와중에서 우거왕이 살해되고 왕자까지 한군에 투항했죠.
기원전 108년 왕검성이 함락되어 고조선은 멸망합니다. 한나라는 고조선에 낙랑군, 임둔군, 현도군, 진번군의 한사군(漢四郡)을 설치했어요 많은 고조선인들은 남쪽으로 이주했습니다.
고조선 멸망 이후
멸망 전후로 많은 고조선 유이민이 남하하면서 한반도 남부에 큰 영향을 미쳤죠. 삼한에서는 이전부터 고조선계 예맥인들이 다수 살았던 것으로 보여요. 삼국사기에는 고조선 유민들이 신라 건국에 참여했다는 기록이 있어요.
이전에 연나라를 피해 남부로 갔던 사람들은 공주 등 충청도, 전라도 동부, 경주 일대로 갔어요. 준왕 남하 당시에는 전북 서부로 주로 갔죠. 한사군 설치 때는 오전남 남서부와 경주로 주로 갔어요. 이들이 남하하면서 목지국, 사로국, 금관가야 등을 세웠어요.
고조선 유이민 중 남하하지 않은 부류는 연나라~서진의 지배 아래 살았어요. 요동 동부~압록강, 두만강 일대의 고조선 유민들은 훗날 부여인들과 힘을 합쳐 고구려를 건국하거나 옥저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기자조선
기자조선(箕子朝鮮)은 고조선 지역에 상나라 왕족 출신인 기자가 와서 세웠다는 나라입니다. 후조선(後朝鮮)으로 칭하기도 했죠. 그 실체에 대한 의심이 꾸준히 제기되어 왔어요. 남북한 학계는 고고학적 발견이 없다는 이유로 기자동래설과 기자조선의 존재를 부정합니다.
근대 역사학 이전에는 고조선의 역사를 단군조선, 기자조선, 위만조선의 3개 시기로 구분했어요. 기자조선은 단군조선과 구분하기 위해 후조선(後朝鮮) 또는 기씨조선(箕氏朝鮮)이라 불렀어요. 문헌상으로는 기원전 1122년~기원전 195년 경까지 존속했다고 해요.
보통 고조선으로만 알고 있는데 단군조선 외에 위만조선도 있었군요. 고조선의 건국 시기가 한국사의 시작이죠. 앞으로 좀더 명확하게 밝혀지길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