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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아카이브

3.1운동 독립선언서 유관순 제암리

by 지식웰니스3 2025. 3.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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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운동은 일제의 식민통치에 저항하고 독립을 외친 대규모 만세운동입니다. 사망자가 7천 명이 넘을 만큼 큰 희생을 치렀지요.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과 지속적인 독립운동의 계기가 된 역사적인 사건입니다. 3.1 운동의 뜻부터 3.1 운동에 대해 자세히 알아볼게요. 독립선언서, 유관순, 제암리 학살, 3.1절 노래 등 주요 이야기도 함께 알아봅시다.

 

3.1운동 독립선언서 유관순 제암리

 

 

 

 

 

목차

     

     

     

     

    3.1 운동 뜻

     

    3.1 운동은 1919년 3/1일, 일제의 식민 지배에 항거하여 독립을 선언하고 전국적으로 벌인 비폭력 평화시위 운동입니다. 이 운동은 조선의 독립을 전 세계에 알린 첫 번째 대규모 독립운동이며, 이후 대한민국 독립운동의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3.1 운동의 특징

     

    비폭력 만세운동

     

    시민들은 거리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평화적인 방식으로 시위를 진행하였습니다. 무기를 사용하지 않았으며, 오직 목소리와 태극기로 독립 의지를 표현하였습니다.

     

     

    전국적 확산

     

    3/1일 서울에서 시작된 시위는 불과 며칠 만에 평양, 대구, 전주, 광주 등 전국 200여 개 지역으로 확대되었습니다. 학생, 상인, 농민, 종교인, 여성 등 다양한 계층이 참여하면서 운동의 규모가 커졌습니다.

     

    해외 동포도 참여

     

    중국, 미국, 러시아 등 해외에서도 한인들이 독립운동에 동참하여 3.1 운동의 국제적인 영향력을 확대하였습니다.

     

     

    3.1 운동 개요

     

    3·1 운동 또는 3·1 만세 운동은 고종의 인산일(장례일)인 3/3일을 이틀 앞두고 일어난 독립 만세운동입니다. 기미독립운동이라고도 부릅니다. 고종이 독살되었다는 독살설이 퍼진 것이 직접적 계기가 되었다고 하지요.

     

     

    만세 운동을 주도한 인물들을 민족대표 33인으로 부르죠. 만세 성명서에 서명하지는 않았으나 만세 운동을 준비한 이들까지 합쳐서 민족대표 48인으로도 불러요. 이들은 모두 구속되거나 재판정에 서게 되죠. 약 3개월 동안 시위가 이어졌고, 조선총독부는 강경하게 진압했어요.

     

    조선총독부 기록으로 집회 참가자 106만여 명, 사망자 7,509명, 구속 4만 7천여 명이었어요. 당시 조선의 인구 1,678만 명 중 6.3%가 만세 시위에 참여한 것이죠.

     

     

    3.1운동의 배경

     

    3.1 운동이 일어난 주요 배경은 다음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1) 일본의 강압적인 식민통치

     

    1910년 한일병합조약으로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으며, 일본은 강압적인 무단통치를 시행하였습니다.

     

    • 헌병 경찰제를 도입하여 조선인을 강력하게 탄압
    • 한국어 사용을 금지하고 일본어 교육을 강요
    • 토지조사사업을 통해 조선 농민들의 토지를 빼앗음

     

     

    탄압 정책으로 조선인들의 독립 의식이 강해졌습니다.

     

    2) 민족의 독립 의식 고조

     

    1919년 1/21일, 고종이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일본이 독살했다는 소문이 퍼졌습니다. 이에 분노한 국민들은 일본의 식민통치를 더욱 강하게 반대하게 되었습니다.

     

     

    3) 국제 정세 변화

     

    1918년 미국 윌슨 대통령이 "민족자결주의"를 선언하면서, 전 세계적으로 식민지 국가들이 독립할 권리가 있음을 강조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독립운동가들은 더욱 희망을 가지게 되었고, 독립을 선언할 준비를 하게 되었습니다.

     

     

    3.1 운동의 전개 과정

     

     

    1) 독립선언서 발표

     

    1919년 3/1일, 서울 태화관에서 민족 대표 33인이 독립선언서를 발표하며 3.1 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 독립선언 장소: 서울 종로구 태화관
    • 주도 인물: 천도교, 기독교, 불교 지도자 포함 총 33명의 민족 대표

     

     

    독립선언서 주요 내용

     

    • 한국이 독립국임을 선언
    • 일본의 식민 지배를 인정할 수 없음
    • 세계 만국에 독립을 호소

     

    2) 전국적인 독립 만세 운동 확산

     

    독립선언 후, 서울 종로의 탑골공원에서 학생과 시민들이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습니다.

     

     

    • 서울 시위: 종로, 남대문, 동대문 등에서 대규모 시위 발생
    • 전국적 확산: 평양, 대구, 전주, 광주 등 200여 개 지역에서 독립 만세운동 진행
    • 해외 확산: 미국, 중국, 러시아 등에서도 한인 사회가 독립운동 동참

     

     

    3) 일본의 무력 진압과 희생자 발생

     

    3.1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일본은 군대를 동원하여 잔혹한 탄압을 가했습니다.

     

    • 총격과 체포: 시위대에게 총격을 가하고, 시위 주도자 체포
    • 수많은 희생자 발생: 약 7,500명 사망. 약 16,000명 부상. 약 47,000명 구속

     

     

    4) 해외 한인 사회의 지원과 반응

     

    3.1 운동은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 한인 사회에도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한인들은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을 지원하고 나섰습니다.

     

     

    ① 중국의 반응과 지원

     

    중국 상하이에서는 3.1 운동 소식을 접한 한인 독립운동가들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을 추진하였습니다. 상하이 한인 사회는 독립운동 자금을 모아 국내로 송금하며 활동을 지원하였습니다. 신한청년당과 같은 독립운동 단체가 일본의 식민통치를 국제사회에 알리기 위해 활발한 외교 활동을 벌였습니다.

     

     

    ② 미국의 반응과 지원

     

    미국에 거주하는 한인들은 3.1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습니다. 미국의 한인 단체는 미국 정부와 국제사회에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는 서한을 보냈습니다. 독립운동가 서재필과 안창호는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알리며 외교적 지원을 요청하였습니다.

     

    ③ 일본 내 반응

     

    일본의 한국인 유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도쿄에서 2.8 독립선언을 발표했어요. 3.1 운동 이후에도 한국 독립을 요구하는 시위를 지속하였습니다.

     

     

    3.1 운동의 결과와 의의

     

    1)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의 계기

     

    3.1 운동 이후 독립운동가들은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할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①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919년 4/11일, 중국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습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한국의 독립을 위한 최초의 민주공화국 정부였습니다.

     

     

    초대 대통령으로 이승만이 선출되었습니다. 임시정부는 독립운동을 위한 군자금 모집, 외교 활동, 무장 독립운동을 지원했습니다.

     

    ② 독립운동의 방향 변화

     

    3.1 운동은 비폭력 평화시위였지만, 일본의 강경한 탄압으로 무장투쟁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후 독립운동은 의열단, 광복군, 한국독립군 등의 무장 독립운동 조직을 중심으로 발전하였습니다.

     

     

    2) 일본의 통치 방식 변화

     

    3.1 운동 이후 일본은 조선인들의 강한 저항을 경험하고, 무단통치의 한계를 느꼈습니다. 이에 따라 조선총독부는 1920년대부터 '문화통치'라는 새로운 정책을 시행하였습니다.

     

    ① 무단통치에서 문화통치로 전환

     

    1910년대에는 조선인에 대한 강압적인 무력 통치를 시행했으나, 3.1 운동 이후에는 겉으로는 유화적인 문화통치(문화정치)로 전환하였습니다.

     

     

    학교와 언론을 부분적으로 허용하여 조선인의 불만을 줄이려 했지만, 실제로는 감시와 통제를 강화하였습니다.

     

    ② 언론과 교육 정책 변화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 일부 신문 발행이 허용되었지만, 검열과 감시가 심하여 자유로운 보도가 불가능하였습니다. 조선인들이 교육을 받을 기회는 증가했으나, 여전히 일본어 교육을 강요하고 조선어 사용을 억압하였습니다.

     

     

    유관순

     

    유관순(1902~1920)은 아우내 3·1만세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입니다. 개신교 집안에서 태어나 1916년 이화학당에 편입했어요. 3·1 만세운동에 참여해 붙잡혔으나 곧 석방되었죠.

     

    휴교령이 내리자 고향인 천안으로 돌아와 4/1일 병천시장에서 아우내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했어요. 투옥 중에도 옥중만세운동을 벌였고, 고문과 영양실조로 18세의 나이로 순국했지요.

     

     

    고종이 서거하자 이화학당 학생들은 상복을 입고, 휴교에 들어갔어요. 3.1 운동 당시 유관순은 남대문으로 향하는 시위 행렬에 합류했어요. 3/5일 학생 연합 시위가 벌어졌는데, 유관순도 만세를 부르다가 일경에 붙잡혔으나 곧 석방되었어요.

     

    휴교령으로 고향에 돌아온 유관순은 부친과 마을 어른들에게 서울의 만세운동 소식을 전했어요. 숨겨온 독립선언서를 내놓으며, 병천 시장에서의 독립만세운동 계획을 상의했지요.

     

     

    태극기를 만드는 등 만반의 준비를 했죠. 4/1일 병천시장에서 수천 명이 참여한 아우내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했어요. 이날 유관순의 부모를 포함하여 19명이 시위 현장에서 순국했지요.

     

    유관순은 주도자로 체포되어 공주교도소에 수감되었어요. 서대문형무소로 옮겨진 유관순은 1920년 3/1일 3.1운동 1주년 기념식을 갖고, 옥중 만세운동을 전개했어요.

     

     

    이 사건으로 유관순 등 많은 애국지사가 심한 고문을 당했지요. 그해 9/28일 18세의 나이로 순국했어요. 요즘 여고생에 불과한 어린 나이죠. 직접적인 사인은 밝혀지지 않았어요. 심한 구타와 영양실조 등에 따른 갑상선 기능저하증을 주된 원인으로 추정하기도 해요.

     

    유관순은 짧은 생애 속에서 큰 업적을 남긴 독립운동가입니다. 그녀는 3.1운동에 참여해 독립을 향한 열망을 외쳤고, 체포되어 고문을 당하면서도 끝까지 민족의 자유를 위해 싸운 영웅입니다.

     

     

    독립선언서

     

     

    1) 3·1 독립선언서란?

     

    3.1운동 당시 독립의 당위성을 밝히고 독립국으로서의 조선, 자주민으로서의 조선인을 선언한 글입니다. 기미독립선언서라고도 하지요.

     

    최린, 손병희 등 천도교 지도자가 중심이 되어 기독교, 불교 등 종교 단체 대표에게 참여할 것을 독려하여 작성되었어요. 최남선이 초안을 작성한 후 한용운이 공약 삼장을 덧붙인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선언서는 천도교 대표 15인, 기독교 대표 16인, 불교 대표 2인 등 민족대표 33인이 서명을 했어요. 1919년 2월 말 2만 1000장을 인쇄, 전국에 배포했지요. 3/1일 서울 인사동 태화관에서 민족대표 33인이 선언식을 가졌고, 파고다공원에서도 학생과 시민들이 모여 선언식을 했어요.

     

     

    2) 선언서 도입부

     

    학교 다닐 때 '오등은 자에 아조선의 독립국임과...' 하면서 선언서를 외웠던 기억이 납니다. 선언서 도입부입니다.

     

     

    우리는 오늘 조선이 독립한 나라이며, 조선인이 이 나라의 주인임을 선언한다. 우리는 이를 세계 모든 나라에 알려 인류가 모두 평등하다는 큰 뜻을 분명히 하고, 우리 후손이 민족 스스로 살아갈 정당한 권리를 영원히 누리게 할 것이다. (후략)

     

    吾等은玆에我朝鮮의獨立國임과朝鮮人의自主民임을宣言하노라此로써世界萬邦에告하야人類平等의大義를克明하며此로써子孫萬代에誥하야民族自存의正權을永有케하노라

     

     

    제암리 학살 사건

     

    제암리 학살 사건은 1919년 4/15일 경기도 수원군 향남면(현. 화성시 향남읍) 제암리의 제암리 감리교회에서 일어난 학살 사건이죠.

     

    제암리 참변은 3·1 운동에 대한 일제의 보복으로 일본 군경이 제암리의 민간인 20여 명을 학살하고 민가 30여 호를 불태운 참변입니다.

     

     

    3/31일 발안 장터의 만세운동에 제암리 사람 몇 명이 참여했어요. 4/15일 일본군은 강연이 있다고 속여 기독교/ 천도교 남자 신자 20여 명을 교회당에 강제로 모이도록 했지요.

     

    갑자기 출입문과 창문을 굳게 잠그고, 안에 있는 사람들을 총칼로 학살했어요. 증거를 남기지 않기 위해 교회당에 불을 질렀어요. 불속에서 뛰쳐나오거나 달아나는 사람은 발포하거나 총검으로 찔러 죽였어요.

     

     

    교회당 안팎에서 28명이 살해되고 민가 31호가 불타버렸죠. 학살의 현장 지휘책임자는 세계 여론의 지탄으로 군법회의에 부쳐졌으나 무죄 판결을 받았다고 해요.

     

    제암리 학살은 일제 강점기의 가장 참혹한 사건 중 하나죠. 독립을 향한 저항과 일제의 폭력적인 통치의 상징적인 예시입니다.

     

     

    3·1절 노래, 헌법 전문

     

    1) 3·1절 노래

     

    3.1절 노래에는 그날의 모습이 잘 그려져 있지요. 1946년 위당 정인보의 3·1절 노래에 작곡가 박태현이 곡을 붙인 것입니다.

     

     

    정인보 작사/박태현 작곡

     

    기미년 3월 1일 정오

    터지자 밀물 같은 대한 독립 만세

    태극기 곳곳마다 3000만이 하나로

    이 날은 우리의 의요 생명이요 교훈이다

    한강물 다시 흐르고 백두산 높았다

    선열 하 이 나라를 보소서

    동포야 이 날을 길이 빛내자

     

     

    2) 헌법 전문

     

    3.1 운동은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 그 정신이 기록되고 있습니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 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이념을 계승하고, 조국의 민주개혁과 평화적 통일의 사명에 입각하여 정의·인도와 동포애로써 민족의 단결을 공고히 하고, 모든 사회적 폐습과 불의를 타파하며, 자율과 조화를 바탕으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더욱 확고히 하여 (후략)

     

     

     

     

    3.1 운동의 뜻부터 3.1운동에 대해 자세히 알아봤어요. 독립선언서, 유관순, 제암리 학살, 3.1절 노래 등 주요 이야기도 알아봤지요. 헌법 전문처럼 3.1운동의 정신은 지금까지 이어져 내란을 막고 민주주의를 지켜가는 힘이 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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