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하얼빈이 빅 히트를 기록하고 있어요. 2024년 12/24일 개봉 이후 12일째 정상을 지키고 있죠. 1/5일까지 누적관객수는 349만 8562명입니다. 하얼빈 흥행과 함께 안중근 의사의 삶도 다시 주목받고 있습니다. 안중근은 1909년 이토 히로부미를 하얼빈에서 총살하고 이듬해 32세의 젊은 나이에 사형당했죠. 하얼빈, 안중근, 안중근의사기념관에 대해 함께 알아봅시다.

하얼빈, 1909년
1909년 9월 안중근은 조선 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가 하얼빈에 온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그 무렵 안중근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항일 운동을 벌이고 있었죠. 안중근은 이토가 10/26일 하얼빈 역에 도착한다는 소식에 동지들과 함께 계획을 짰어요.
먼저 열차가 정차하는 채가구에서 우덕순과 조도선이 1차로 암살을 시도하고 여의치 않으면 하얼빈에서는 자신이 2차로 저격하기로 했습니다. 채가구에서 이토를 포살 하려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어요. 이제 남은 것은 안중근의 거사 계획뿐이었죠.
1909년 10/26일 아침 안중근은 하얼빈 역으로 달려갔어요. 아침 9시 열차가 플랫폼 안으로 들어서기 시작했어요. 이토는 환영나온 러시아의 재무대신 코코프초프와 열차 안에서 약 30분간 회담을 했어요. 9시 30분경 코코프초프와 역구내에 도열한 러시아 의장대를 사열했죠. 그리고 열차 쪽으로 향하여 가기 시작하였습니다.
바로 이때 의장대 뒤에 있던 안중근은 앞으로 뛰어나가며 재빨리 브라우닝 권총을 꺼냈어요. 그리고 이토의 가슴과 머리를 향해 세 발을 쏘았어요. “탕, 탕, 타앙!” 총소리가 하얼빈 역에 울려 퍼졌어요. 총을 맞은 이토는 그 자리에서 쓰러졌지요.
하지만 안중근은 이토의 얼굴을 정확히 몰랐어요. 그래서 권총에 남아 있던 세 발을 이토를 뒤따르던 일본인들에게도 쏘았어요. 이 총격으로 이토를 수행하던 일본인 관리들이 총탄을 맞아 중경상을 입었어요.
러시아군에 체포될 때 안중근은 러시아 말로 외쳤어요. “코레아 우라! 코레아 우라!” (대한 만세). 총탄 세례를 받은 이토는 열차로 옮겨져 응급처치를 받았으나 결국 절명했어요. 조선 침략의 원흉이자 동양평화의 파괴자인 이토는 안중근에 의해 단죄되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고 말았죠.
중국은 하얼빈 역에 안중근이 이토를 저격한 지점과 이토가 서 있던 지점을 표시해 기념하고 있어요. 하얼빈은 당시 러시아가 관리했지만 지금은 중국 땅이죠.
안중근은 하얼빈 역에 있는 러시아 헌병 파출소로 끌려갔다가 일본 영사관으로 넘겨졌어요. 이듬해 열린 재판에서 이토를 왜 죽였는지 묻자 이렇게 대답했어요.
“내가 이토를 죽인 것은 ... 대한 제국의 독립과 나아가서 동양의 평화를 위한 사명이기 때문이었소.... 한국 독립 전쟁의 한 부분이요, 또 내가 일본 법정에 서게 된 것도 전쟁에 패배하여 포로가 되었기 때문이오.... 나는 전쟁 포로일 뿐이지 범죄자가 아님을 명심하시오.”
사형이 선고되자 두 동생에게 유언을 남겼어요.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 두었다가 우리가 독립이 되거든 고국으로 옮겨 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마땅히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힘을 다할 것이다. (중략) 곧 대한 독립의 소리가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을 추며 만세를 부르리라."
관동 도독부는 1910년 3월 26일 안중근을 교수형에 처했어요. 이때 그의 나이 서른 두 살이었어요.
대한민국 정부는 안중근 의사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습니다.
안중근

개화사상을 키우며 성장
안중근 (安重根)은 1879년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순흥이고, 아명은 응칠(應七)입니다. 가슴과 배에 7개의 점이 있어 북두칠성의 기운에 응하여 태어났다는 뜻으로 응칠이라 지었어요. 천주교 세례명은 토마스(도마)입니다.
부친은 근대적 신문물의 필요성을 인식한 혁신 유림으로 개화적 사고를 지니고 있었어요. 안중근은 8세 때부터 유교경전 등 한학과 조선역사를 배우며 민족의식을 키웠습니다. 또한 부친의 영향으로 개화적 사고를 지니게 되었죠. 말타기와 활쏘기 등 무예를 연마하며 호연지기를 길렀고, 사격술을 익혀 명사수로 이름을 날렸습니다.
천주교에 입교
1894년 동학농민전쟁이 발생하자 부친은 군대를 조직하여 반동학군 투쟁에 나섰어요. 안중근도 군대에 참여하여 선봉장으로 활약했습니다. 그 후 부친을 따라 천주교에 입교했어요. 영세를 받고 토마스(Thomas, 도마, 多默)라는 세례명을 받았죠.
의병활동
을사늑약이 체결 후 1906년 삼흥학교를 세우고, 이어 남포 돈의학교를 인수하여 인재양성에 힘썼습니다. 그 후 합법적인 방법으로는 나라를 바로 세울 수 없다고 판단하여, 1907년 연해주로 가서 의병운동에 참가하였습니다.
1908년 대한의군참모중장 겸 특파독립대장 및 아령지구 사령관으로 두만강을 건너 국내로 침투, 일본군과 격전을 벌였으나 패퇴하였습니다.
동의단지회
1909년 동지 11명과 죽음으로써 구국투쟁을 벌일 것을 손가락을 끊어 맹세하고 동의단지회(斷指會)를 결성하였습니다. 그해 10월 이토 히로부미가 하얼빈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처단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하얼빈 안중근의사기념관

하얼빈(Harbin)은 중국 제일 북쪽에 위치한 헤이룽장성의 성도입니다. 중국에서 10번째로 큰 도시로 인구 천만의 대도시입니다. 만주 지방의 정치, 경제, 과학, 문화, 통신의 중심지로 하얼빈 빙설축제로 유명해요.
하얼빈역은 1909년 10/26일 안중근 의사가 이토히로부미를 처단한 곳입니다. 안중근의사의 의거는 우리 민족의 독립에 대한 열망을 세계에 알리고 독립운동을 크게 고양시켰죠.
하얼빈역 구내에는 안중근 의사가 권총을 발사한 장소와 이토가 총탄을 맞은 장소를 네모와 세모표식으로 표시해 놓았어요. 하얼빈 역사는 새롭게 건립되어 과거의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지만, 플랫폼은 옛날과 크게 변하지 않았다고 해요.
2014년 1월 하얼빈역 내에 안중근의사기념관을 새롭게 건립했습니다. 기념관은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했던 장소를 조망할 수 있는 위치에 세웠어요. 안중근 의사의 출생과 가계, 의병활동, 이토 히로부미의 처단 과정, 재판과 순국 과정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하얼빈, 안중근, 안중근의사기념관에 대해 알아봤어요. 안중근은 1909년 이토 히로부미를 하얼빈에서 총살했죠. 재판받고 사형을 당하는 순간까지 당당함을 잃지 않았어요. 그 담대함과 용기에 머리가 숙여집니다. 어설픈 친일 뉴라이트들이 판치는 세상에서 안중근 의사가 보여준 진정한 애국심이 그립습니다.